2020년 7월 7일, 동국제강이 창립 66주년을 맞았다. 국내 최초 와이어로드 생산, 국내 최초 전기로 제강공장 가동, 국내 최초 후판 생산···. 한국 철강업계 ‘최초의 길’을 선도해 온 동국제강의 발자취를 시대별로 간략하게 담아봤다. [편집자주]

■ 개척기(1954~1970)

쇠못을 만들던 회사에서 철강회사로

동국제강의 태동은 한국전쟁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회장인 故 장경호 회장이 1954년 한국특수제강을 불하받아 회사를 창립한 것이 시초다.

그러나 이에 앞서 근간이 된 건 ‘못과 철사’였다. 장 회장은 1949년 재일동포로부터 기계를 인수하여 못과 철사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사업상 큰 기회를 맞이했다.

특히, 전쟁 이후 전후 복구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못과 철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장 회장은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동국제강을 세우고 본격적인 철강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1959년 국내 최초로 와이어로드 생산에 성공했고, 1961년에는 철근 생산을 개시했다. 2년 뒤인 1963년에는 부산제강소를 가동하며 눈부신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부산 남구 용호동 갯벌 12만여 평을 매립한 부지에 초대형 제강소를 설립한 것.
이는 당시 동국제강을 국내 넘버원 철강회사로 만들어준 배경이자 현재까지도 ‘용호동 매립지에서 이룩한 성공신화’로 회자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집념으로 불모의 갯벌을 메워라”는 장경호 회장의 창업 정신이 깃들어있는 일이기도 하다.

동국제강의 거침없는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3년 뒤인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용광로를 설치했다. 연산 3만~4만톤 수준의 소형 용광로였지만 사실상 초기 형태의 고로 사업을 시작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국내 최초 전기로 제강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당시 동국제강이 처음 사용했던 전기로는 1999년 근대 문화재로 지정되며 충북 음성 ‘철 박물관’에 보관될 정도로 획기적인 시설로 평가 받는다.

■ 도약기(1971~1990)

국내 최고 민간 철강회사로 우뚝

7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동국제강의 모습은 ‘국내 최고 민간 철강회사’ 그 자체였다. 1971년 국내 최초로 후판 생산을 시작한 데 이어,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거대하게 불려갔다.

1972년에는 한국철강, 한국강업을 인수합병 했고, 같은 해 국내 최초로 컬러강판 생산까지 시작했다. 이는 이후 흡수합병 된 유니온스틸(당시 연합철강)이 주도한 것으로 국내 고품질 표면처리제품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출발점이 됐다. 현재 국내 컬러강판 업계 1인자로 꼽히는 동국제강의 명맥이 시작된 뿌리이기도 하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국내 최초 빌릿 연속 주조기를 도입하며, 또 한 번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75년에는 장경호 회장이 세상을 뜨며 장상태 사장이 가업을 이어 받았고, 10년 뒤인 1985년 장상태 사장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렇게 커오던 회사는 1986년 국제그룹 계열사인 연합철강, 국제통운, 국제종합기계를 인수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2년 뒤인 1988년에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도약기를 마쳤다.

■ 성장기(1991~2000)

포항 시대 개막···글로벌 철강사 넘보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동국제강은 시야를 더욱 넓혀갔다. 국내 최고 민간 철강업체를 넘어 글로벌 철강사로 거듭나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거점은 포항이었다. 1991년 포항 1후판공장을 준공한 데 이어 1997년 포항 2후판공장을 가동했다. 1999년에는 포항 봉강공장과 형강을 위주로 생산하는 신평공장의 불을 켜며 포항 시대를 활짝 열었다. IMF 사태와 함께 핵심 라인이 부산 용호동 공장에서 포항으로 이전돼 넘어온 영향도 있었다.
어찌됐든 동국제강은 이를 바탕으로 부산, 인천, 포항, 당진 등 지구촌 곳곳에 철강재를 수출할 수 있는 탄탄한 거점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성장기 기간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직류전기로 도입(1993년)’이다. 이 전기로는 당시 국내 전기로 업체가 보유한 것 중 생산규모가 가장 큰 설비였을뿐더러 원가절감 측면에서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도입 당시 셈법에 따르면 직류전기로는 교류전기로보다 전력 소비가 적어 톤당 제강비용이 4,700원 정도 절약될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연간 제강능력이 70만톤 정도라고 볼 때 매년 30억원 정도의 원가절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아울러 전극봉이 3개인 교류전기로와 달리 1개의 전극봉으로도 고철을 녹일 수 있는 아크열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도 주목을 받았다. 전극 소모가 적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 현재(2001~)

걸어온 반백년, 걸어갈 반백년

21세기 들어 동국제강의 행보는 쉽지만은 않았다. 외환위기, 세계 경제 불황 등 여러 변수가 발목을 잡았다. 3대째 염원이 담긴 고로 건설 문제로도 마음고생이 컸다.

시간 순서로 살펴보면 2001년 장세주 사장이 신임 회장으로 취임했다. 아버지 장상태 회장 타계 후 장남인 장세주 사장이 3대째 가업을 이어받은 것. 이후 형제회사인 동국산업, 한국철강, 조선선재 등 3사를 분가시키고, 2003년 연합철강을 완전 자회사로 전환했다.

2004년에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CI를 변경했고, 이듬해인 2005년에는 브라질 제철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CI는 지난해 초 현재 디자인으로 바뀌기 전까지 15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2007년에는 부산공장 연속산세압연강판라인(PL-TCM)을 준공했고, 2010년에는 당진공장과 인천제강소 에코아크 전기로를 가동했다. 2011년에는 성공적인 브랜드 네이밍 마케팅으로 꼽히는 ‘럭스틸(Luxteel)’을 런칭하며 컬러강판 1위 업체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미래를 향하던 발걸음은 2014년 잠시 멈춰 섰다. 재무구조개선약정 대상 기업에 포함되며 강력한 구조조정을 겪게 됐기 때문. 이는 고로 건설에 대한 염원으로 투자한 브라질 CSP 제철소의 상업화가 늦어졌고, 핵심 사업이던 후판 부문 수익성 감소가 더해진 결과였다.

당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브라질 CSP는 동국제강(이하 투자 비율 30%)이 브라질 광산회사 발레(50%), 포스코(20%)와 합작으로 설립한 법인이다. 2012년 착공에 들어갔지만 여러 악재가 겹치며 회사 경영진의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이 영향으로 동국제강은 본사 사옥인 페럼타워를 매각하고, 포항 후판 2공장 구조조정, 계열사 매각 및 지분 유동화 등을 통한 조직 슬림화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자회사였던 유니온스틸을 완전 흡수합병(2015년)하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2016년 6월 2년 만에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조기 졸업했고, 비슷한 시기 브라질 CSP가 온간 난관 끝에 고로 화입을 시작하며 한숨을 돌렸다. 지난해에는 CSP 제철소가 가동 2년 만에 흑자를 내며 영업 수익을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영업이익 측면에선 2015년부터 회복세가 감지됐다. 장세욱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수익성 개선에 힘쓴 결과다. 실제로 동국제강은 작년 4분기 연속 흑자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18분기 연속 흑자 기록을 이어가기도 했다. 4년 넘게 흑자가 지속된 것.

최근인 2019년에도 세계 최초 업적을 달성했다. 다양한 질감과 패턴을 구현할 수 있는 컬러강판의 강점을 금속가구에 고스란히 담아내 눈길을 끌었다.

유구한 역사를 거치며 국내 철강업계를 선도해온 동국제강. 업계 최초라는 무수한 업적과 국내 최고 컬러강판 메이커로서 걸어온 시간을 넘어 앞으로의 발자취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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