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양조장,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도주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한다.” - 아담 스미스

아담 스미스는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하며 자유방임의 시장경제체제를 옹호했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성실히 추구하면 시장의 조절작용으로 경제는 원활하게 운영된다는 주장이다.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현대에 이르러 시장의 기능에 경제를 온전히 맡겨야 한다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승화했다. 완전한 경쟁이 건강하고 합리적인 시장을 만들 것이란 믿음의 근거.

그러나 아담 스미스로서는 억울할 일이다. 그는 사실 시장체제의 가장 큰 적으로 독점을 지목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온전하고 건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전제로 경제활동에서 필요한 만큼만 수요와 공급이 발생하는 ‘청렴한 상태’를 제시했다. 동시에 경제 주체들의 과열된 이기심과 건강하지 못한 시장 운용이 만들어낼 뒤틀림에 대한 우려도 빼놓지 않았다. 시장은 이기심을 긍정하는 그의 말은 곧잘 인용하면서 독점과 과욕, 불합리를 경계하는 그의 조언은 등한시한다.

“같은 업종의 사람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만나더라도 대화 내용은 소비대중에 대한 사기, 즉 담합 모의로 끝난다.” - 아담 스미스

기준가 협상 이탈

연초부터 철근업계는 소란스럽다. 제강사가 더 이상 건자회와 기준가 협상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제강사는 제강사대로 건설업계와 유통업체들의 반발을 맞이하고 있다. 건설업계는 그동안 유지해오던 시스템이 갑작스럽게 파행된 여파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통업체들은 제강사가 정한 가격이 너무 비싸다며 시장 상황과 맞지 않는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불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두가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

그동안 철근 가격은 생산자인 철근 제강사와 구매자인 건설업계가 적정 가격을 협상하는 방식으로 ‘결정’됐다. 수요와 공급 곡선에 의해 적정한 시장 가격이 ‘도출’된다는 시장경제 논리와는 사뭇 동떨어진 방식이다.

이 시스템은 수요와 공급의 과잉이나 과부족 때문에 가격이 널을 뛰고 시장에 혼란이 발생하는 일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양 산업을 모두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시스템은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부자재 가격같이 시스템을 만들 당시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요소들이 새로운 이슈로 등장했다.

타협과 절충을 전제로 하는 ‘협상’이라는 방식도 문제였다. 협상의 상대를 향해 양보와 타협을 요구하며 자기주장을 내세우다 실기(失期)하는 일이 잦았다. 협상에 나선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의 대표성 역시 문제 삼을 수 있다. 협상에 나서지 못한 업체들은 ‘경쟁사가 결정해 준 가격’으로 철근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준가 협상이 파탄을 맞은 건 그래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강사들은 자기가 만든 상품을 자기들이 책정한 적정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됐다. 당장은 높아진 가격 때문에 불만인 구매자들도 시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잔치는 끝났다

기준가 협상에서의 이탈은 비단 가격 결정 체계의 변모가 아니다. 지난 연말부터 이어진 철근 시장 체질개선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지난 연말부터 제강사들은 가공철근 저가수주를 중단하고 유통업체들에 대한 현금할인을 폐지했다. 수요가 적고 경쟁력이 부족한 일부 강종에 대해서는 할증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제강사들이 수익성을 저해하던 ‘군더더기’들을 쳐내고 체질 개선을 통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지난 2년은 제강사들에게 유례없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건설경기를 비롯한 한국 경제 전체의 불황이 시작됐다는 전망이 지배적이고 철근 제강사들의 수익성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제강사들은 위기감을 감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잔치는 끝났다.

제강사들이 체질 개선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시장의 체질 개선이란 적정한 수요와 공급이 만들어낸 가격에 기반하는 일이다. 그동안 눌어붙어 있던 군더더기를 쳐내는 일이란 자율적이고 건강한 시장 경제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귀환.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선 시장의 청렴한 상태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동안 제강사들에 눌러 붙어 있던 ‘군더더기’는 결국 판매 촉진을 위한 과열경쟁을 기반한다. 옆집보다 10원이라도 더 깎아주면 1톤이라도 더 팔 수 있지 않겠냐는 판단이 그동안의 시장 왜곡을 주도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기준가 이탈을 비롯해 저가 가공수주 중단이나 할인폐지 같은 것들은 모두 ‘수익은 줄더라도 더 깎아서 더 팔겠다’는 과욕과 과열경쟁에서 탈피해 적정 공급과 적정 수요라는 시장의 청렴상태를 유지해야 가능한 일들이다.

모든 관건은 ‘제강사가 저가 판매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느냐’다. 가공철근의 저가수주나 기준가 협상, 과도한 할인은 철근 시장이 왜곡되면서 나타난 ‘증상’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는 것은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증상을 야기한 ‘병’은 저가 판매, 더 근본적으로는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과열경쟁’이다.

잠시의 대증요법으론 건강을 되찾을 수 없다. 당장 건자회는 수입철근을 통해 제강사의 방침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동절기의 수요 감소로 유통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와중에 수입산 철근의 유통량 증가는 국산철근의 판매 부진과 가격 하락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다. 이같은 상황에서 제강사들이 저가 판매를 통한 판매량 회복의 유혹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모처럼 시도하는 철근 시장의 개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기실 제강사들에 대한 업계의 신뢰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시도’는 많았으나 정작 지켜진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곧 시장 정상화는 외면당하고 제강사마다 저가 판매를 통한 판매 경쟁을 시작할 것이란 의혹의 눈초리가 우세하다. 제강사들은 모종의 시험대에 올라선 셈이다. 당장 제강사들의 의지는 강해보인다. 기준가 협상 이탈과 저가 수주 중단 논의는 과거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의지의 표명이다.

해본 사람은 알지만 다이어트는 어려운 일이다. 매일밤 야식의 유혹을 견뎌내야 하고 힘겨운 운동을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제강사들이 명심해야 할 건 지금은 다이어트를 성공하지 못하면 생존자체가 위협받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지금 제강사들은 다이어트 식단을 만들었고 헬스클럽에 회원등록을 해놓은 셈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라도 몇 번이고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의지를 관철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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